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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피조물

진리의증인 2024. 1. 4. 06:16

메시지174(34) 새로운 피조물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17-19)

 

서론: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울 사도께서는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被造物)이란 새롭게 태어나고 새로 지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에는 새로운 피조물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을 떠나거나 예수님 말씀과 뜻을 거역하면 새로운 피조물의 지위를 상실하고 옛사람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뜻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죄에서 구원받을 수 없고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 자녀와 하나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고, 하나님 자녀와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죽음을 통해 죄에서 구원받고,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했으며, 하나님 자녀와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피조물의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의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인생관이 무엇이냐? 예수가 신앙과 인생의 주인이 되고 예수가 신앙과 인생의 목적이 돼야 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지만 새로운 피조물이 된 지금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인생의 주인이 되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은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여 하나님과 예수님 입장에서 생각하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위해 일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515절에서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과거의 나의 주인과 옛날의 내 인생은 주인은 나()라는 우상(偶像)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와 나의 유익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지금은 예수님을 위해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죄에서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와 희생도 기꺼이 감수해야 하고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나에게 아무리 유익하고 귀한 것도 예수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면 분토(糞土)와 배설물처럼 버리고 포기해야 합니다(빌립보서 3:8).

예수는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머리로 믿는 관념적인 신자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관념적인 신자는 머리로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어떤 희생과 헌신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태한 순간을 만나거나 신앙으로 불이익을 받게 되면 예수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관념적인 신자는 자신의 신앙고백과 모순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관념적인 신자는 말로는 예수를 믿지만 행위로는 예수를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사람이 변하지 않을 수 없고, 삶이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변하지 않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허영심, 자존심, 시기, 질투, 거짓말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갈 때의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유치하고 부끄럽게 살았던 날들은 지난날로 족합니다. 이성과 양심이 깨어있지 못하고 하나님과 세상을 오락가락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최선을 다했지만 부족하고 부끄럽고 아쉬운 점은 회개하면 예수의 공로로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의 인생관을 가지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새로운 피조물은 자신의 직분과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11절 상반절에서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을 권면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가 사람들에게 권면한 것이 무엇이냐? 예수를 믿어야 죄에서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생명의 복음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두려워서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왜 하나님을 두려워했느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 크고 너무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독생자를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죗값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공포심(恐怖心)에서 온 것이 아니라 경외심(敬畏心)에서 온 두려움입니다. 도둑이나 죄인이 형벌을 두려워하고 인간이 가난과 폭력을 두려워하는 것은 공포심에서 온 두려움입니다. 반면에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 갖는 두려움은 경외심에서 온 두려움입니다. 공포심이 형벌과 강압에 의한 두려움이라면 경외심은 위대한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감동해서 느끼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여기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간음과 도둑질을 한 죄인이요 교활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 불의하고 악한 인간이 존귀한 분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는 백번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저분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 저분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감사하고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왜 두렵습니까? 그분을 실망시키거나 그분의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된다는 이성과 양심의 압박 때문입니다. 이 감정이 경외심이며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클수록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커지는 것입니다.

옛날에 왕이 행차를 하면 수많은 신하와 군대의 호위가 따랐습니다. 그러나 왕의 행차와 위엄이 아무리 웅장해도 인간의 마음까지 사로잡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두려움은 감압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마음과 영혼까지 사로잡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 깨달은 사람이 갖는 감동과 경외심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아는 사람은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사자굴과 불 속에 던져지고, 요셉이 치한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바울 사도는 죄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생명의 복음을 힘써 전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9:16,에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부득불(不得不) 복음을 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득불이 무슨 뜻이냐? 하고 싶지 않아도 안 할 수 없고,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기꺼이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구원해주셨다는 생명의 복음은 전하고 싶지 않고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917절에서 내가 자의로 복음을 전하면 상을 받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원해서 복음을 전하면 상을 받겠지만 나는 사도로 직분을 받고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가 얼마나 사명감이 투철합니까? 그리스도인은 투철한 사명감을 가져야 하며 사명감에 불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구경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주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투철한 사명감과 불타는 사명감으로 하나님과 교회에 충성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13절에서도 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에 미쳤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14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가 편안하게 쉬고 한가하게 앉아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복음을 전하도록 깨우치시고 강권적으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와 천국 백성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과 사명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새로운 피조물은 화목의 사신이 돼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18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화목의 사신이 된 것입니다. 화목의 사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이냐? 평화를 이루고 평화를 조성하며 힘써 평화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하나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인간은 아담의 원죄를 유전받아 태어날 때부터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나고,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속죄의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과 화목이 이뤄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가 청산되고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화목의 사신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힘써 화목을 이루고 평화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화목의 사신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영적 담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이사야 59:1-2).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또한 화목의 사신은 화목을 이루고 평화를 만드는 피이스 메이커(Peace maker)가 돼야 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좋은 분위기가 깨지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나는 피이스 메이커가 아니라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입니다. 원수처럼 지내던 사람들이 화해하게 만들고 평화를 조성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평화를 깨뜨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는 곳마다 기쁨을 주고 평화를 조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화목의 사신으로 평화를 만들고 평화를 조성하는 피이스 메이커가 되셔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의 인생관을 가지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신앙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새로운 피조물은 자신의 직분과 사명에 충성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직분을 잘 감당하셔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새로운 피조물은 화목의 사신의 직분을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화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사람들에게 힘써 평화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이 주신 직분과 사명을 잘 감당하시고, 화목의 사신으로 교회와 사회에 평화를 이루시고 평화의 복음을 전파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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