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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

진리의증인 2022. 10. 21. 05:29

이 정만 목사 (HP:010-5359-1617)

블로그(네이버:논산동산교회, 다음:논산동산교회)

 

메시지339(121)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

 

1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요한계시록 3:14-22)

 

서론: 라오디게아(: Λαοδικεία 라오디케이아)는 빌라델비아와 골로새 사이에 있으며 오늘날 터키 공화국의 중부 지역에 위치합니다. 아시아의 중요한 여러 도시들과 연결되는 지점에 위치한 라오디게아는 상공업이 발달했습니다. 상공업의 발달은 라오디게아에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고 물질의 풍요는 자만과 나태를 가져왔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유일하게 칭찬은 한마디도 받지 못하고 책망만 받은 교회입니다.

이 시간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다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본문 15절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 라오디게아 성도들의 신앙상태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다는 뜻입니다. 차다(헬라어 프수크로스 ψυχρος)는 말은 얼음이 얼 정도로 차가운 상태를 말하는데 신앙에 냉담하고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뜨겁다(헬라어 제스토스 ζεστός)는 말은 물이 끓을 정도로 뜨거운 상태를 말하는데 열정적이고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미지근하다는 말의 뜻은 무엇이냐? 미지근하다(헬라어 클리아로스 Χλιαρος)로 번역된 말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역겨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음식은 차게 먹어야 맛있는 음식이 있고 뜨겁게 먹어야 맛있는 음식이 있습니다. 차게 먹거나 뜨겁게 먹어야 할 음식을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한 상태로 먹으면 맛이 어떨까요? 구역질이 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미지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면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미지근하다는 말은 결단력이 없고 용기가 부족하다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인생에서 매사가 다 그렇지만 신앙에도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용기와 결단력이 없는 사람은 큰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큰 그릇으로 사용될 수 없으며 체험적인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또한 미지근한 상태는 가장 부패하기 쉬운 상태입니다. 아주 차거나 아주 뜨거운 상태에서는 병균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음식물의 부패와 병원균의 증식은 미지근한 온도에서 진행됩니다. 성도의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것은 은혜가 떨어지고 믿음이 식어져서 영적인 부패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신앙이 미지근한 상태가 되면 교회 일에 냉담하고 무관심하고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미지근한 상태는 영적으로 서서히 죽어 가는 단계입니다. 미지근한 믿음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지는 않지만 방관자와 구경꾼이 되어 하나님과 멀어지기 때문에 결국 영적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왜 미지근한 상태에 빠졌느냐? 물질의 풍요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우리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본문 17절에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들의 물질적 부요를 영적 부요와 신앙의 부요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라오디게아의 자만과 물질적 풍요를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주 후 61(AD 61)에 대 지진으로 도시가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은 라오디게아의 재건을 위해 많은 물자를 보냈지만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로마의 지원을 거절하고 그들의 힘으로 도시를 재건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국가의 지원을 거절할 정도로 물질이 풍부했던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가 무엇이냐? 물질적 부요를 영적 부요로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물질을 가진 사람은 물질로 사람을 판단하고, 물질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며, 물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물질을 소유하고 부자가 되면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에는 물질로 얻을 수 없고 물질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돈이 있다고 인격자가 되고 돈이 있다고 자식을 훌륭하게 기를 수 있습니까? 돈이 있으면 병에 안 걸리고, 돈이 있으면 안 늙고, 돈이 있으면 안 죽습니까? 재물이 주는 헛된 자만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물질적 부요와 영적 부요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는 가난하고, 곤고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들의 영적 빈곤을 깨닫지 못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있을 때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명기 8:12, 이하). 물질은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의 풍요는 하나님 축복이지만 물질을 의지하고 물질을 잘못 사용하면 타락하고 영적으로 미지근한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미지근한 신앙은 열심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어떤 수고나 희생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성도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칼라일은 미지근한 상태에 대해 그 자체가 위선이라는 것을 모르는 위선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한 자를 입에서 토하여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들의 신앙이 미지근한 상태에 있지는 않을까요? 그리스도인은 미지근하다는 책망을 받지 않도록 열정적이고 뜨거운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금과 흰옷과 안약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금과 흰옷과 안약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8절에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로 연단한 금이 무엇이냐? 불로 연단한 금은 믿음을 말합니다(베드로전서 1:7). 금이 들어있는 광석을 뜨거운 용광로에 넣으면 물질이 용해되는 온도에 따라 납, 구리, , 철 등 여러 가지 물질이 녹아서 나오는데 이런 과정을 몇 번 반복해야 순수한 금이 만들어집니다. 불로 연단한 금은 순수한 믿음과 진실한 믿음을 상징합니다. 순수하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또한 금은 부요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는 말씀은 진실하고 순수한 믿음을 가져 영적인 부자와 믿음의 부자가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사야 할 두 번째 물건은 흰옷입니다. 예수님은 본문 18절 중반절에서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흰옷은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것을 상징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 부요를 영적 부요로 착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영적 빈곤과 수치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라오디게아 교회가 사야 할 세 번째 물건은 안약입니다. 옛날부터 라오디게아가 자랑하는 세 가지가 있었는데 라오디게아의 물질적 부와 라오디게아에서 생산되는 의복과 라오디게아의 안약을 세상에서 최고라고 자랑했습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 라오디게아 안약은 효능이 탁월해서 어떤 눈병에 걸렸든지 한 번만 눈에 바르면 완쾌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자랑하는 안약을 사서 그들의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의 잘못은 보고 비판하면서 그들 자신의 잘못은 보지 않고 비판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금과 같이 귀한 믿음을 가져야 하고, 흰옷처럼 흠 없고 티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믿음을 가져야 하며, 남을 보기 전에 자신을 먼저 보고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비판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은 미지근한 상태에서 깨어나 문을 열고 주님을 맞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문 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문은 문고리가 밖에 달려 있기 때문에 밖에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과 구원의 문은 밖에 문고리가 없기 때문에 밖에서는 열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마음의 문을 열어야 예수님께서 들어오시고 구원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마음의 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으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세계적인 화가였던 윌리암 홀만 헌트(William Holman Hunt 1827-1910)는 경건하고 종교심이 강해서 성화(聖畫)를 많이 그렸습니다. 헌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란 그림에 보면 예수님께서 깊은 밤중에 담장으로 둘러쌓이고 안으로는 빗장이 굳게 채워진 어떤 집의 대문 앞에 서 계시는데 문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밖에서 계속 문을 두드리시지만 안에서는 대답이 없습니다. 그 문이 얼마나 오랫동안 잠겨 있었는지 들포도 덩굴과 가시나무가 문 위에까지 자라나 있습니다. 이 그림의 대문 안에 있는 사람이 혹시 우리의 가족과 우리의 친구는 아닐까요? 기독교와 세상의 종교가 다른 점은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찾아오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세상의 신이나 세상의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님입니다. 인간이 마음의 문을 열어야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열고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자와 함께 먹고 마시며 예수님을 영접한 자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헬라 시대의 부자들은 하루 세 끼 식사를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 두 끼를 먹었습니다. 초기 로마의 귀족들도 보통 하루에 두 끼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조반과 점심이 헬라어 아리스톤(ʾάριστον)이라는 한 단어로 기록돼 있습니다(요한복음 21:15, 마태복음 22:4 ). 헬라인들이 먹는 아침은 아크라티스마(ακρατισμα)인데 마른 빵을 포도주에 적셔서 먹는 간단한 식사입니다. 그리고 점심은 아리스톤(ʾάριστον)인데 점심식사도 간단했습니다. 빵 조각에 채소를 곁들인 도시락을 먹거나 죽을 쑤어 먹었습니다. 고대 헬라나 로마의 음식문화는 그 당시의 넉넉하지 못한 경제사정으로 채식과 절식의 검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녁 식사는 훌륭했습니다. 헬라의 돈이 많은 귀족이나 상류계층의 사람들은 저녁 식사에 손님을 초대했습니다. 저녁 식사에 손님을 초대하여 햄, 소시지, 육류 고기와 생선, 과일 등 풍성한 식탁을 준비해서 먹고 마셨으며 식후에는 포도주와 과자와 음료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는 하루 일을 마친 후에 하기 때문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먹고 마시면서 떠들썩하게 토론도 하고 즐겼습니다. 저녁 식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차분하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잔치와 같은 식사였습니다. 본문에 먹는다는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는 데이프내소(δειπνήσω)인데 명사형은 데이프논(δεΐπνον)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영접한 자와 함께 먹고 마시겠다고 말씀하신 식사는 저녁식사인 데이프논(δεΐπνον)입니다.

헬라인들이 하루 일을 마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넉넉하게 차려진 식탁에서 함께 이야기하며 밤이 깊도록 먹고 마신 것처럼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충성 된 성도들과 천국에서 그런 풍성한 식사를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한다면 얼마나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천국에서 누구나 예수님과 식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 충성하고 헌신한 성도가 예수님과 먹고 마시는 천국의 만찬에 참여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예수님께 충성하고 헌신한 성도가 천국에서 예수님과 만찬을 하며 예수님과 사랑의 교제를 갖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을 입에서 토하여 버리겠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에서 음식이 썩고 부패하는 것처럼 신앙도 미지근한 상태에서 죄악과 타락의 길로 가게 됩니다. 미지근한 믿음은 병든 믿음입니다. 열정적이고 뜨거운 믿음으로 충성하셔서 천국에서 예수님과 사랑의 만찬을 나누실 수 있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 10, 23.

 

*학습자료* 라오디게아의 창건자는 헬라의 영향을 받은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2(재위 B.C. 261-B.C.247)인데 그가 도시를 세우고 그의 아내 라오디케(Laodice)의 이름을 따 라오디게아로 명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