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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정신으로 행하라

진리의증인 2022. 8. 26. 04:30

이 정만 목사 (HP:010-5359-1617)

블로그(네이버:논산동산교회, 다음:논산동산교회)

 

@메시지29(로마60) 사랑의 정신으로 행하라

 

13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14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6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로마서 14:13-16)

 

서론: 로마 교회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친 고기를 먹는 것과 특정한 날을 종교절기로 지키는 문제로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 사이에 다툼과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이 강한 자들을 두둔하면서도 동시에 믿음이 약한 자들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교회에서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 사이에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 믿음이 약한 자가 상처를 받거나 시험을 당하면 믿음이 강한 자의 행위가 정당해도 책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 15절에서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형제가 시험에 들게 하면 믿음이 강한 자가 사랑의 정신으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에는 사랑의 정신으로 행하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신앙의 진리가 아닌 문제로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상대를 비판하면 안 됩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 13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비판(批判)으로 번역된 말은 비난과 정죄와 멸시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은 믿음이 강한 자들의 행동을 불신앙적이라고 비판하고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의 우려를 미신이나 유치한 수준의 신앙이라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양쪽 모두에게 경솔한 비판과 정죄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로마 교회는 먹는 음식과 날짜를 지키는 문제로 비난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교회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들로 구성돼 있었는데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 성도들이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1장에는 무엇은 먹을 수 있고 어떤 것은 먹을 수 없다는 음식에 관한 규례가 나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음식에 관한 규례를 엄격하게 지킵니다. 반면에 이방인 성도들은 음식에 관한 규례가 없기 때문에 어떤 음식이나 자유롭게 먹고 마십니다. 옛날 로마 사람들은 그들이 신으로 섬기는 우상에게 제사를 지낸 다음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문제는 시장에서 파는 고기 중에 어떤 것이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고기이고 어떤 것이 제물이 아닌지 구별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음식에 대한 규례를 철저하게 지키고 자랐기 때문에 우상의 제사에 제물로 바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고기를 먹는 육식 자체를 죄악시하고 금지했습니다. 다니엘처럼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진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아예 고기를 먹지 않은 것입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고기를 안 먹는 것은 물론 고기를 먹는 이방인 성도들까지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 사이에 비난과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 로마 교회는 종교절기 문제로 비난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옛날부터 유대인들은 많은 날을 종교절기로 지켰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시내 산에 올라간 날, 율법을 받고 시내 산에서 내려온 날,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한 날, 바벨론에 잡혀간 포로들이 돌아온 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날 등 많은 날을 종교절기로 지켰습니다. 문제는 유대인 성도들이 종교절기로 지키는 날들이 기독교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성도들이 종교절기로 지키는 날들이 유대인들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기독교와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돌아온 날이 기독교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유대인 성도들은 기독교와 전혀 상관이 없는 날들을 종교절기로 지킨 것입니다. 로마 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유대교에서 배우고 지킨 관습과 전통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 성도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이방인 성도들을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과 신앙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은 신앙이 좋고 고기를 먹는 사람은 신앙이 없습니까? 또 고기나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이것이 제물이냐 아니냐?” 확인을 하고 먹어야 합니까? 그리고 성경에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시내 산에 올라간 날과 율법을 받고 시내 산에서 내려온 날을 특별한 날로 지키라는 말씀도 없습니다. 로마 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은 기독교와 아무 관계도 없는 문제로 이방인 성도들을 비판하고 정죄한 것입니다. 로마 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이 지혜가 부족하고 사랑의 정신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입장에서 이방인 성도들을 비판하고 정죄한 것입니다. 정치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로 의견이 다르면 논쟁을 피하고 중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진리가 아닌 문제로 논쟁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믿음이 약한 형제 앞에 신앙의 장애물을 두면 안 됩니다.

본문 13절에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이 무엇이냐? 부딪쳐서 상처받고 걸려서 넘어지고 시험에 빠질 수 있는 신앙의 장애물을 말합니다. 믿음이 약한 성도들이 신앙에 시험이 들지 않도록 믿음이 강한 성도들이 조심하고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때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 사이에는 항상 반목과 질시가 있었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은연중 자기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고 우월감을 가졌고 이방인 성도들은 유대인은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라고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생활습관 중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는 세 가지가 있었는데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행을 하고 피를 먹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목을 매서 잡은 짐승을 먹는 것은 모세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짐승의 피를 먹는 행동이라고(레위기 3:17) 강한 거부감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이런 거부감은 초대 교회 때에 교회 안에서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 사이에 분쟁을 일으켰고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유대인들의 거부감을 해소하고 교회의 분쟁을 막기 위해 유대인들이 싫어한 세 가지를 금지하도록 결정했습니다(사도행전 15:20).

어떤 집사님이 그리스도인이 개고기를 먹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으냐?”고 물었습니다. 집사님은 레위기 11장에 근거해 개는 쪽 발도 지지 않았고, 새김질도 하지 않고, 사도행전 15:20,에 목매어 죽은 것을 멀리하라고 했으니 먹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몇십 년 전만 해도 개고기를 식용으로 먹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개에 대한 생각이 식용에서 반려동물로 바뀌었기 때문에 개고기를 먹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음식도 시대에 따라 바뀌고 변하는 문화입니다. 개고기 먹는 것을 어떻게 해야 교회에 덕이 될지 고민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개고기의 식용이 어떤 사람에게는 혐오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 14절에서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는 속된 것이 없지만 속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속되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 더럽다 혹은 부정하다는 기준은 식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어야 할지 먹지 말아야 할지 문제시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에 꺼림칙하면 먹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것은 하라, 이것은 하지 말라고 명백하게 말하지 않는 것은 대부분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경우 신자 개인의 양심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게 하는데 이것을 기독교 윤리학에서는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합니다.

이웃집에 사는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김 집사 집에 고사(告祀) 지낸 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김 집사는 그것이 무슨 음식인지 모르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반면에 김 집사 부인은 고사음식 같다는 생각이 들어 꺼림칙해서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김 집사 어머니는 고사음식 같다는 말에 먹고 싶지 않았지만 김 집사가 맛있다고 권하는 바람에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고사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 김 집사와 어머니의 행동은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김 집사가 어떤 음식인지 모르고 먹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어머니에게 먹도록 권한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또한 어머니도 꺼림칙한 생각이 들면 안 먹어야 합니다. 꺼림칙한 마음으로 먹으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김 집사처럼 먹어도 잘한 것이고 김 집사의 부인처럼 먹지 않아도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꺼림칙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먹도록 권한 것은 문제가 되고 김 집사 어머니처럼 꺼림칙한 마음으로 먹으면 죄가 됩니다. 양심을 거스르면서 먹고 마시는 행위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복음 안에서 자유라고 그리스도인이 아무 음식이나 함부로 먹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직업적으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준 제물은 먹지 않아야 합니다. 무당이 펄쩍펄쩍 뛰면서 굿을 한 음식이나 절간의 중이 제사를 지낸 음식은 먹으면 안 됩니다. 상황윤리(狀況倫理)가 있습니다. 상황윤리란 어떤 극한 상황에서 용인하지 않을 수 없는 임시적이고 특수한 윤리를 말합니다. 가령 전쟁이나 특별한 상황에서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면 제사를 지낸 음식이나 어떤 음식을 먹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먹을 음식이 풍족한 환경에서 우상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부정하고 깨끗하지 않은 음식은 안 먹는 것이 좋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사랑의 법칙에 어긋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 건강 재능 사회적인 지위 등 이 모든 축복은 사랑의 정신과 사랑의 법칙에 의해 사용해야 합니다. 믿음이 약한 자는 아무리 나이가 많고 아무리 학식이 많아도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약한 자를 어린아이처럼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잘 돌봐야 합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의 앞에 부딪칠 것이나 넘어질 수 있는 신앙의 장애물을 놓아두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사랑의 정신으로 행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 15절에서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형제는 신앙으로 대해야 하지만 신앙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신앙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의 정신으로 대해야 합니다. 믿음의 형제를 먹는 음식이나 사소한 문제로 근심하게 하고 시험에 빠지게 했다면 사랑과 관심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사랑 앞에서는 내 자유나 내 권리보다 내 책임과 내 의무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유의 남용으로 믿음의 형제를 시험에 빠뜨리고 근심하게 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헛되게 하는 죄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본문 16절에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것이 무엇이냐?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당당하고 떳떳한 행위를 말합니다. 신앙이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 할지라도 잘못 사용하면 허물이나 비방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불신자나 이방인에게 거부감을 주거나 비방을 받지 않도록 지혜롭게 행동하고 처신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윤리를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대로 행하라는 한 마디 말로 표현했습니다.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한 마디 안에 다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대단히 심오하고 의미가 깊은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이 하나님만 사랑하고 다른 것은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에는 네 형제를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의미와 네 형제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을 지키고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과 형제에게 상처를 주고 하나님 뜻에 역행하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정당하고 옳은 일도 절제하고 삼가야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의 정신으로 행하는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은 정당하고 떳떳한 자유와 권리도 사용할 때와 절제해야 할 때를 압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사랑의 정신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첫째, 신앙의 진리가 아닌 문제로 형제를 비판하고 정죄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나 이념과 사회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과 입장이 다르다고 신앙의 진리가 아닌 문제로 상대를 비판하고 정죄하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믿음의 형제 앞에 신앙의 장애물을 두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의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신앙의 장애물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성도 앞에 신앙의 장애물을 두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사랑의 정신으로 행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율법과 정의와 원칙만 가지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정신으로 행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이 무심코 한 행동으로 믿음이 약한 자가 넘어지고 시험에 빠지면 죄가 됩니다. 사랑의 정신으로 행하는 사람은 믿음이 약한 자를 시험에 빠뜨리거나 넘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는 기독교와 사랑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전도나 구제나 봉사나 무엇을 하든지 사랑의 정신으로 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