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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진리의증인 2022. 7. 29. 01:52

이 정만 목사 (HP:010-5359-1617)

블로그(네이버:논산동산교회, 다음:논산동산교회)

 

@메시지154(마태35)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태복음 5:38-42)

 

서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법을 렉스 탈리오니스(Lex Talionis)라고 합니다. 이 법을 복수법(復讐法) 또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라고도 합니다. 이와 비슷한 법이 바빌론의 함무라비(Hammurabi, 바빌론 제1왕조의 6대 왕 BC 1728-1688 재위) 법전(法典)에 기록돼 있는데 함무라비 법전은 주전(BC) 1700년경에 제정된 법으로 인류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成文法)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모세 율법이 함무라비 법전과 유사하다고 모세 율법과 함무라비 법전을 비교해서 연구하는데 이것은 지혜롭지 못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모세 율법과 함무라비 법전은 입법의 목적과 법의 적용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세 율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지만 함무라비 법전은 계급에 따라 법을 적용하는 계급적법제도(階級的法制度)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같은 계급과 같은 신분에 속한 사람끼리만 동일한 보복과 배상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사가 신사의 다리를 다치게 하고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에게 상해를 입히면 가해자도 그만큼 상해를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가 귀족이나 신사에게 상해를 입혀도 동일한 상해를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동전 한 닢만 주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신사의 이빨을 부러뜨리면 가난한 자의 이빨을 부러뜨려야 하지만 신사나 귀족이 노동자나 가난한 자의 이빨을 부러뜨리면 동전 한 닢만 주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모세 율법과 함무라비 법전은 입법의 목적과 법의 적용이 전혀 다릅니다.

이 시간에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악한 자를 대적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출애굽기 21:24-25,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율법을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주셨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판권은 주시지 않았습니다. 재판권은 이스라엘 재판관과 통치자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재판권을 왜 이스라엘의 재판관과 통치자들에게 주셨느냐? 개인적으로 복수하고 보복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개인적으로 보복과 복수를 하면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혼란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보복하고 복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스라엘의 재판관과 통치자들에게 재판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서기관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보복과 복수를 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법은 개인적인 복수나 보복을 금지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사사로운 복수나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잠언 24:29,에서는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라말씀하고 있고 레위기 19:18,에서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반복되고 있습니다만 모세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법이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판권은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율법학자인 서기관들이 개인적으로 보복할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바로잡기 위해 개인적으로 복수하거나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법이지만 잔인하게 보복하고 개인적으로 복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재판권은 재판관과 통치자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악한 자를 대적하면 안 되는 이유는 개인적인 보복이나 복수로는 악을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악을 악으로 되갚고자 하는 불행한 심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악이나 죄에 대한 형벌의 기준과 원칙이 자기중심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끼친 피해는 항상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타인이 나에게 끼친 손해는 항상 매우 크고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내가 받은 것보다 몇 배 많은 것으로 되돌려주고 갚고자 하는 위험한 욕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고 복수하는 일이 허용되면 피비린내 나는 보복의 악순환이 자손 대대로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복수를 아버지가 갚고 아버지의 복수를 아들이 갚고 아들의 복수를 손자가 갚는 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개인적인 복수와 보복을 금지하신 것입니다. 개인적인 보복이나 복수로는 악을 끊을 수 없고 악에 승리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이 개인적인 복수와 보복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악한 자를 대적하면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악한 자에게 대적하는 것을 금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로마서 12:17,에서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말씀하고 있으며 로마서 12:21,에서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악한 자를 악한 방법으로 대적하면 같이 악한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 보면 신앙의 조상들도 악한 자들을 악한 방법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박해했던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하나님께 맡기고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사무엘상 24, 26). 요셉도 동생을 노예로 팔아먹은 불의한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악한 자를 대적하면 안 됩니다.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법의 심판에 맡겨야 합니다. 시인은 악인을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존재로 비유했고(시편 1:4) 사도 베드로는 악인을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라고 말씀하셨습니다(베드로후서 2:17). 그리스도인이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아도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한다는 것을 명심하셔야합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서 볼 수 있듯이 악인의 부귀영화는 잠깐이며 이 세상으로 한정돼 있습니다. 악인의 부귀영화는 죽음과 함께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악한 자와 싸우고 복수하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광풍에 사라질 안개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악인의 심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 뜻은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법으로 개인적인 복수를 막고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고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문 40절에서 소송(訴訟)의 문제를 예로 들어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하나님 축복으로 옷을 전당잡혀 돈을 쓰는 사람이 없지만 우리나라도 50-60년 전에는 음식, 입는 옷 등 모든 것이 다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서민들은 옷이나 시계나 반지 같은 물건을 전당포에 잡히고 돈을 빌려 썼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은 옷을 전당잡히고 돈을 빌려 썼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옷은 속옷과 겉옷 두 가지가 있었는데 속옷은 무명이나 얇은 천으로 만든 것으로 값이 쌌지만 겉옷은 담요처럼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져서 값이 비쌌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이스라엘에서 겉옷은 용도가 매우 다양했습니다. 겉옷은 외출이나 외부에 출입할 때에 몸에 걸쳤으며 팔레스틴의 뜨거운 햇빛을 피하는 용도로도 사용했습니다. 또 이스라엘처럼 사막성 기후는 낮에는 뜨겁지만 밤에는 기온이 많이 내려갑니다. 그래서 밤에 잠을 잘 때 가난한 사람들은 겉옷을 입고 자거나 이불 대신 겉옷을 덮고 잠을 잤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밤에 추위를 피해 겉옷을 입고 자거나 이불로 덮고 잠을 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는 가난한 자가 겉옷을 전당잡히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줘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2:26-27,에서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가 밤에 추위에 떨지 않도록 해가 지기 전에 겉옷을 돌려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밤에 추워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면 옷을 전당잡고 돌려주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어떤 채권자가 재판을 걸어서 채무자의 속옷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채무자는 자신의 속옷만 주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겉옷까지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겉옷까지 주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냐? 악한 자와 대적해서 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지금 소송을 해서 속옷을 요구하는 사람은 이웃에 사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악한 사람입니다. 선량한 사람은 악한 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악한 자를 이기려면 악한 자보다 더 악해져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은 악한 자의 요구가 정당하지 못하고 지나칠지라도 악한 자와 싸우지 말고 들어주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악한 자와 싸워서 이길 수 없고 악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자가 요구한대로 주고 요구한 것 이상으로 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본문 41-42절에서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억지로 5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 리를 가라는 말씀은 옛날 페르시아제국의 우편제도(郵便制度)에서 유래했습니다. 옛날에 페르시아제국은 뛰어난 우편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옛날 페르시아제국의 우편제도가 헬라제국과 로마제국을 거쳐 오늘날 세계적인 우편제도로 발전했습니다. 페르시아는 그들의 광대한 제국에 왕의 명령이나 왕의 우편물을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전국을 말()로 달려서 하룻길 되는 거리로 나누어 전국에 수많은 역()을 설치했습니다. 역에는 왕의 사자가 쉬어가거나 숙식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고, 왕의 사자가 갈아타고 달릴 수 있는 새로운 말과, 왕의 사자에게 필요한 것들이 준비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사자에게 어떤 것이 필요하면 아무에게나 명령하고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왕의 사자가 무엇을 요구하고 어떤 지시를 하면 무조건 따르고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페르시아와 헬라와 로마와 수많은 나라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습니다. 정복자들은 수시로 백성들을 동원하고 백성들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고 물자를 징발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몹시 괴롭고 힘이 들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통치자들의 그런 요구에 대해서도 기꺼이 호의에 찬 마음으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국가권력에 반기를 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상대가 무례하고 공손하지 못한 태도로 도움을 요구할지라도 그들의 요구에 인색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42절에서도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고 기꺼이 주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난과 어려운 때를 만날 수 있고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은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고난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돌보고 도와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오래도록 후회가 되고 가슴에 남는 회한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누구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누구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누구와 싸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내가 용서하고 잊어버리면 됩니다. 그러나 내가 베풀고 도와줘야 할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인색한 마음으로 상대의 고난을 외면하면 우리의 양심은 평생 우리를 괴롭힙니다. 양심이 편안하지가 않습니다. 돈이 남아돌아서 구제와 자선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유가 없고 넉넉하지 못해도 고난에 처한 사람을 도와줘야 우리의 양심이 자유를 누리고 우리 영혼이 참된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물론 구제를 악용하여 게을러지고 점점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남에게 손을 벌리는 부작용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구제를 지혜롭게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혹시 속는 한이 있더라도 구제가 필요한 사람을 거절하여 돌려보내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거절하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악한 자를 이기려면 악한 자보다 더 악해져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악해지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선량한 사람은 악한 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을 괴롭히는 악하고 무례한 자가 있습니까? 불의한 자에게 당하고 악한 자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신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 아시지요. 너무 억울하고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십니다. 저의 체험적인 고백입니다. 악인은 하나님 심판으로 반드시 멸망합니다. 악한 자에게 악한 방법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시고 사랑으로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 7,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