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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주일

진리의증인 2021. 10. 29. 06:58

이 정만 목사

블로그(네이버:논산동산교회, 다음:논산동산교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서론: 15171031, 34세의 젊은 신부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부패하고 타락한 중세 교회에 종교개혁의 불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개혁교회에서는 매년 10월 마지막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종교개혁이 무엇이냐? 그릇된 전통이나 잘못된 종교적 관습을 성경에 입각해서 고치고 바로 잡는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배경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마틴 루터가 성령의 조명(照明)에 의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복음을 재발견한 것과 중세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종교개혁의 동기와 목적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종교개혁은 루터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복음을 재발견한 데서 시작됐습니다.

마틴 루터는 14831010일 독일의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광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한 루터는 일반교양 과정을 마치고 그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공부에 몰두했습니다. 젊은 청년시절 루터의 꿈은 법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친구의 죽음으로 법학공부를 중단하고 신학도의 길로 가게 됩니다. 어느 날 루터는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합니다. 루터는 친구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의식과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법학공부를 중단하고 그해 7월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엄격한 수도원의 계율에 따라 훈련을 받고 수도원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루터는 1507년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특히 문과(文科)와 신학(神學)에서 학문적인 재능이 뛰어난 루터는 문학사와 신학박사가 되어 수도원과 대학에서 강의에 전념했습니다. 루터는 외견상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영적인 상태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루터를 가장 숨막히게 한 것은 루터가 카톨릭교회의 신학에 몰두하여 공부를 할수록 구원에 대한 확신이 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행에 가까운 수도원 훈련이나 신학 공부나 그 어떤 것도 루터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지 못했습니다. 루터는 독일의 신비주의자인 타울러(Tauler)도 찾아가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하고 루터의 영적 방황은 계속되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생명력 없는 예배와 비성경적이고 미신적인 예전(禮典 예법으로 규정한 제도)에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313(AD 313)2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에 대한 탄압과 박해에 종지부를 찍고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기독교는 당시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벌였는데 로마에는 조잡하게 번역된 라틴어 성경이 40여 개나 난립해 있었습니다. 1세기 이후 고대 로마인을 중심으로 지중해() 세계에서 사용된 언어가 라틴어인데 서로 의미와 뜻이 다르게 번역된 조잡한 라틴어 성경은 선교와 신앙 교육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감독 다마수스(366-384)는 라틴 교부이자 학자였던 히에로니무스 (Eusebius Sophronius Hieronimus, 345?-420?, 영어 이름은 제롬, Jerome)에게 통일된 라틴어 성경을 새로 번역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불가타역(Vulgata, 일명 벌게이트역)입니다. 불가타역의 등장으로 조잡하게 번역된 라틴어 성경이 사라지고 통일된 라틴어 성경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는 이 라틴어 성경이 교회의 개혁을 막고 신앙을 타락시키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새로 번역된 라틴어성경만 인정하고 다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래서 로마를 비롯한 서유럽 교회들은 라틴어 성경만 사용하고 라틴어를 교회의 공식 예배용어로 사용했습니다. 문제는 로마를 제외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국가들은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라틴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라틴어 성경을 읽어주고, 라틴어로 설교를 하고, 세례와 성찬 등 교회 의식을 라틴어로 진행한 것입니다. 알아듣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라틴어 성경을 읽어주고 라틴어로 설교를 하면 성도들이 은혜를 받겠습니까? 못 받겠습니까?

설교를 알아듣지 못하고,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세례와 성찬에 참여해도 기쁨과 감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화상(畵像)예배(성자나 종교적 인물들의 화상을 놓고 예배함)가 생기고 성자 숭배와 사도 숭배와 마리아 숭배가 시작됐습니다. 라틴어로 진행되는 예배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화상예배나 성자숭배나 마리아 숭배 같은 비성경적인 예배의식이 생겨나고 세례나 성찬과 같은 예전이나, 고행과 선행 같은 공로사상으로 신앙의 수단이 변질된 것입니다. 기독교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기독교와 우상숭배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절간에 가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개혁 때까지 서유럽 교회들이 기독교의 울타리 안에 머문 것만도 기적이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종교개혁의 결정적 계기는 마틴 루터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복음을 재발견한 데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511년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옮긴 마틴 루터는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그 대학에서 성경을 강의했습니다. 루터는 그때까지도 구원에 확신을 갖지 못했으며 사람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에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루터는 고행과 수도와 기도와 선행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지만 그런 것들로는 구원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 안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다락방에서 강의를 준비하던 중 성령의 조명으로 복음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복음의 재발견이란 원래부터 성경에 있던 진리를 지금까지 잊고 있거나 모르고 있었는데 그 진리를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어느 날 루터는 학교 안에 있는 수도원의 다락방에서 강의를 준비하던 중 로마서 1:17,의 말씀을 읽다가 성령의 조명으로 구원의 원리를 재발견하게 됩니다. 다 같이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7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마틴 루터의 온 몸과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는 인간의 행위나 율법이나 고행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죄에서 구원받고 의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의 구속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재발견이요 칭의(稱義)의 깨달음입니다. 구원은 율법이나 행위나 종교의식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복음을 재발견한 데서 시작됐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종교개혁은 부패하고 타락한 중세교회를 개혁하고 새로운 개혁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는 너무 부패하고 타락해서 교회의 사명을 전혀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카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의 사례 중 두 가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첫째, 종교개혁 당시 로마카톨릭 교회는 성직매매(聖職賣買)가 관례화되어 있었습니다. 성직매매가 무엇이냐? 성직자의 자리를 돈으로 사고판 것입니다. 어느 지역의 교회에 성직자 자리가 나면 성직자의 자리를 입찰에 붙였습니다. 성직자의 자질이나 성직자로서 사명감이 있느냐 없느냐에 상관없이 최고의 금액을 써낸 사람에게 성직자의 자리를 판 것입니다. 교회와 성직자 자리가 돈에 거래가 된다면 그런 교회와 그런 성직자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중세교회의 로마카톨릭은 성직자의 자리가 돈에 거래될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로마교회의 부패와 타락의 두 번째 사례는 교회가 면죄부(免罪符)를 판매했습니다. 면죄부가 무엇이냐? 교회가 돈을 받고 죄를 사함받는다는 증서를 판 것을 말합니다. 면죄부의 기원은 교황 우르바누스 2(Urbanus 二世, 재위 1088-1099)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으로부터 기독교 성지인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 십자군(十字軍)을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군전쟁을 성전(聖戰)으로 규정하고 십자군전쟁에 참여한 자는 그들의 모든 죄가 면죄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면죄부의 기원이 됩니다. 성전(聖戰)에 참여하면 죄를 사함받는 것처럼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면 죄를 사함받는다고 면죄를 판매한 것입니다. 면죄부는 죄의 문제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심어주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사면되고 악하고 무거운 죄를 지으면 더 많은 돈을 내고 더 많은 면죄부를 사면 죄를 사함받는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카톨릭교회는 죄를 범한 신자가 신부에게 죄를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하면 죄를 사함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의 고해성사는 성경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신부가 무슨 사죄의 권한이 있어서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겠습니까? 사죄의 권한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성당의 건축이나 교회의 재정을 확보할 목적으로 중세(5세기부터 15세기 중엽 동로마제국 멸망까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면죄부를 판매했는데 로마 카톨릭은 면죄부를 팔기 위해 그들이 주장해 온 고해성사에 사죄의 조건을 하나 더 붙였습니다.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면 죄인은 용서를 받지만 죄의 형벌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이 죄의 형벌(poena)은 영벌(eternal punishment)이 아니라 세상적인 형벌(temporal punishment)이기 때문에 기도나, 구제나, 선행이나, 시편을 읽거나, 성지순례를 하거나,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면 죄의 형벌이 속()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 성경에 없는 면죄부까지 만들어서 판매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 당시의 교황은 레오 10(Leo 十世, 재위 1513-1521)였는데 레오 10세는 교황에 즉위한 후 로마를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고 교황청의 주권을 강화하는 업적을 남겼지만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생활로 로마 교황청은 얼마 안 가서 재정이 바닥났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교황청의 재정을 확충할 목적으로 성직을 매매했고 1517년에는 성베드로 성당을 건립하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 밑에 있던 독일 마인츠의 대주교 알베르트(Albert)는 독일의 전국 교회에 면죄부에 대한 설교를 강요하고 면죄부를 팔도록 독려하는 교서를 보냈습니다. 그때 알베르트 대주교가 파송한 사람이 요한 테첼(Tetzel)인데 테첼은 헌금함에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연옥(煉獄)에 있는 영혼이 연옥의 불에서 해방되어 낙원으로 간다고 주장하며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렸습니다. 이처럼 부도덕하고 비성경적인 면죄부 판매가 마틴 루터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15171031,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성() 교회의 정문에 95개 조항의 질의서를 붙이고 면죄부 판매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는데 이것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어 부패하고 타락한 로마 카톨릭의 절대권력이 무너지고 개혁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을 떠나 새로운 교회를 만들 목적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루터는 카톨릭 안에 머물면서 부패한 로마 카톨릭을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이 루터를 위협하고 개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개혁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로 목숨을 걸고 부패한 로마카톨릭 교회와 싸워 개혁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 정신은 오백 년이 지난 오늘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결정했고, 과거 자유당의 독재정권과 군사독재 정권을 지지했으며, 광주시민의 피를 흘린 살인마들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또 교파가 사분오열로 찢겼으며 정치하는 목사와 장로들은 교권을 쟁탈하기 위해 지역주의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한 번도 자기반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자기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빼지 않고 세상을 향해 당신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고 소리 지른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한국교회의 자화상입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도 정치, 언론, 경제, 노사 등 모든 분야에서 절실하게 개혁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야든지 개혁이 없이는 발전이 불가능하며 개혁은 언제나 나의 희생이 전제돼야 성공합니다. 그리고 개혁에는 완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사회는 시간이 가면 새로운 적폐가 쌓이고 새로운 모순을 양산하기 때문입니다. 개혁이 없는 교회는 외면받고 개혁이 없는 나라와 민족은 멸망합니다. 종교와 정치와 언론과 경제 등 우리 사회의 개혁에 앞장서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 10, 31.

 

** 종교개혁과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들 **

** 종교개혁을 이룩한 사람은 마틴 루터지만 루터 이전에도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개혁의 선구자들이 있습니다. 12세기 프랑스의 왈도(Peter Waldo), 14세기 영국의 위클리프(John Wyclif, 1324-1384), 보헤미아(체코)의 후스(John Huss, 1369-1415),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 등이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입니다. 영국의 위클리프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로 기독교회의 법률은 오직 성경뿐이라고 가르쳐 많은 성도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지만 종교개혁을 반대한 로마 교황청은 위클리프가 죽은 후 그의 묘를 파헤쳐 뼈를 불살라 화형에 처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또한 후스와 사보나롤라도 화형에 처했으며 수많은 개혁의 선구자들이 순교의 제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종교개혁이 일어난 배경으로 첫째, 로마 교황의 아비뇽 유수(幽囚) 사건 이후 급속히 약화된 교황권. 교황의 아비뇽 유수 사건이란 1309년부터 1377년까지 7대에 걸쳐 로마 교황청을 남프랑스 론 강변의 아비뇽(Avignon)으로 이전한 사건으로,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에 비유해 교황의 바벨론 포로라고 함. 교황 보니파우티스 8세와 싸워 이긴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1305년 프랑스인 출신 교황 클레멘스 5세를 로마로 보내지 않고 프랑스에 붙잡아 둠.

둘째, 성경 위에 군림하는 로마 카톨릭의 그릇된 종교적 전통.

셋째, 중세 후기 스콜라신학(기독교 사상에 중심을 둔 신학)의 개인주의적인 경향과 체험적인 신비 주의 신앙의 대두.

넷째,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과학과 문명의 발달.

다섯째, 민족국가주의의 대두 등 여러 요인이 있지만 결정적 원인은 마틴 루터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복음을 재발견한 것과 중세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