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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아난 과부의 아들

진리의증인 2021. 10. 8. 08:50

17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병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열왕기상 17:17-24)

 

서론: 본문의 주인공은 사르밧 과부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 과부의 사랑하는 아들이 갑자기 병으로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으니 과부의 슬픔과 충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로 과부의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 시간에는 다시 살아난 과부의 아들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과부에게 아들이 우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데려가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은 아합 왕과 백성들의 우상숭배로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흉년과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굶주려 죽었습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 은혜로 3년 반 동안이나 계속된 흉년에도 전혀 굶주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 배불리 먹고 살아가도록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과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갑자기 병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과부에게 왜 그토록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주셨을까요?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르밧 과부의 아들은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과부에게 우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부의 아들을 데려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와 자식과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부모와 자식과 형제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사랑에는 원칙과 사랑의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사랑의 원칙과 사랑의 우선순위가 무엇이냐? 첫째가 하나님이고 그다음이 자식과 부모와 형제와 이웃입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우선할 수 없고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2 계명에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어떤 형상의 우상이든지 섬기지 말라......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든지, 명예든지, 남편이든지, 자식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우상이 되고 하나님의 질투와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 과부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문제는 과부에게 아들은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우상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상이 된 과부의 아들을 데려가신 것입니다. 물질이나 명예나 가족이 그리스도인의 우상이 되면 안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우상이 무엇이냐?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대상으로 우상을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우선순위와 사랑의 방법이 잘못돼서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돈이 우상이 되고 하나님보다 남편이나 자식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과 자식이 우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우상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사르밧 과부의 믿음은 하나님도 인정하시고 예수님도 인정하셨습니다(누가복음 4:25-26). 그런데 사르밧 과부의 신앙에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합당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사랑했고 아들이 우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과부의 우상이 된 아들을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이 첫 번째라는 사랑의 원칙과 사랑의 우선순위를 잘 지켜야 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셔야합니다. 과부에게 아들이 우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상이 된 과부의 아들을 데려가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인간은 의로운 사람을 통해 자기 죄를 깨닫고 불행 앞에서 자기 죄를 회개합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느냐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진실하고 의로운 사람을 통해 자기의 죄를 깨닫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게 됩니다. 사르밧 과부는 자기 집에 엘리야 선지자를 모시면서 엘리야 선지자의 경건한 삶을 통해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새롭게 개혁하는 데는 더디고 둔하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고 배우는 데는 빠르고 민첩합니다. 좋은 것을 보면 좋은 것을 배우고 나쁜 것을 보면 나쁜 것을 배웁니다. 그래서 훌륭한 부모와 진실한 친구와 좋은 이웃은 인생의 위대한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철인 소크라테스의 친구 중에 알시비아데스(Alcibiades)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알시비아데스는 성격이 급하고 사납고 분별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지적인 소크라테스와는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알시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사랑하고 좋아해서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알시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만날 때마다 친구 소크라테스여! 나는 그대를 증오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대를 만날 때마다 그대는 나로 하여금 내가 어떤 사람인가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알시비아데스는 거칠고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지만 소크라테스의 훌륭한 인격 앞에서 자기의 허물과 부족함을 깨닫고 양심의 갈등과 번민을 달게 받아들여 친구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을 통해 자기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과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그녀의 죄를 깨닫고 자신의 삶을 돌아본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정의와 진리의 사표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처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이 아니라 삶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실패와 고난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의 죄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이 형통하고 일이 잘될 때는 죄에 매우 둔감(鈍感)합니다. 승승장구(乘勝長驅)하고 성공의 계단을 올라갈 때는 죄를 짓고 불의를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 은혜라고 강변합니다. 성공하고 형통한 날에는 아무리 간절히 충고를 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사업이 실패하고 가정에 불행이 닥치고 건강에 이상이 오면 정신을 차리고 혹시 내가 어떤 죄를 짓지는 않았는지, 내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사르밧 과부도 아들이 죽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의 죄를 깨닫고 고백했습니다. 성공했다고 교만한 사람과 성공했다고 친구와 이웃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얼마 못 가서 넘어지고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패하고 나서 후회하는 사람은 지혜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정상에 있을 때 겸손하고 남에게 죄를 지적 받기 전에 스스로 회개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공하고 형통할 때 더욱 겸손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인간은 의로운 사람을 통해 자기 죄를 깨닫고 고난과 불행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죄를 회개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엘리야 선지자처럼 세상 사람들이 본받고 따를 수 있도록 빛과 진리 가운데 행하셔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인은 엘리야 선지자처럼 인내하고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야비하고 배은망덕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으로 이스라엘에 3년 반 동안이나 가뭄과 흉년이 계속되었지만 사르밧 과부와 그녀의 아들은 엘리야 선지자 때문에 전혀 흉년의 굶주림을 겪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집에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 흉년의 굶주림에서 과부의 가정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통에 남은 가루 한 움큼과 병에 남은 기름으로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그녀의 집에 보내사 흉년의 굶주림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 선지자는 3년 반 동안 계속된 흉년과 굶주림에서 사르밧 과부와 그녀의 아들을 구원하여 준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죽고 나자,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가 아들을 죽게 했다고 불평과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본문 18절에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왔느냐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과부가 죄책감을 갖고 괴로워한 것도 엘리야 선지자 때문이고 과부의 아들이 죽게 된 것도 엘리야 선지자라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3년 반 동안 계속된 흉년에서 과부와 과부의 아들을 구원해 준 생명의 은인을 불행과 비극의 원흉(元兇)으로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은망덕도 분수가 있지 과부는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습니다. 과부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과부의 아들을 데려가신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 때문에 아들이 죽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보통사람 같으면 과부를 심하게 책망하고 과부의 집에서 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 선지자는 과부의 터무니없는 원망과 비난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는 과부의 죽은 아들을 취하여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정신을 집중해서 기도하기 위해 다락방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정신을 집중하는 것은 기도의 생명입니다. 산만한 분위기에서 하는 기도와 정신이 집중되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께 올라가지 않습니다. 경건한 성도가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 기도할 때 정신이 집중되고 간절한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정신을 집중해서 기도하기 위해 다락방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다락방으로 올라가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과부에게 살아난 아들을 돌려주면서 네가 나에게 그럴 수 있느냐?”고 섭섭한 감정을 토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 선지자는 과부에게 아들을 건네면서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는 바알 선지자 450 명과 대결하여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여 그들을 다 죽이고 우상을 숭배한 아합 왕을 책망한 신앙의 용사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의 사람이었지만 여인의 무지와 어리석음에는 한없이 참고 인내하신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얼마나 훌륭하고 얼마나 위대합니까?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전쟁 중에 야전 막사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막사 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알렉산더 대왕의 흉을 보며 왕에게 심한 욕설을 해댔습니다. 왕에 대한 욕설은 한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몇 명의 병사들이 신이 나서 돌아가면서 계속 시끄럽게 지껄였습니다. 잠에서 깬 알렉산더 대왕은 막사 밖으로 나가 병사들에게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으니 할 말이 더 있으면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계속하라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전시에 왕을 욕하고 비방한 자들은 왕의 권한으로 현장에서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은 왕의 권세와 힘이 아닌 인내와 용서로 그들을 굴복시킨 것입니다.

인내와 겸손의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내와 겸손은 언제나 강한 자의 미덕입니다. 약하고 힘없는 사람이 참고 인내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못 됩니다. 약하고 힘없는 사람은 참고 인내하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강하고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자에게 인내하고 관대하면 많은 사람이 감동합니다. 그래서 인내를 강한 자의 미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속물과 비열한 인간은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합니다. 일본 사람의 국민성을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하다고 말합니다. 좋은 인간성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엘리야 선지자처럼 불의와 죄악과는 타협을 거부하는 강한 사람이 돼야 하지만 약하고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한없이 참고 인내하는 인자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기도하셨습니다(누가복음 23:34). 그리스도인은 엘리야 선지자와 예수님처럼 상대가 어리석고 무지하고 배은망덕하게 행동해도 참고 인내하는 사람이 되셔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첫째, 과부의 아들이 우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과부의 아들을 데려가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기면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첫 번째라는 사랑의 원칙과 사랑의 우선순위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사람은 의로운 사람을 통해 자기 죄를 깨닫고 불행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죄를 회개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본받고 배우도록 정의와 진리의 등대와 정의와 진리의 사표로 의롭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엘리야 선지자처럼 불의와 죄악과는 타협을 거부해야 하지만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에게는 참고 용서하는 인자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용서하시고 예수님께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참고 용서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인내를 실천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 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