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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의 역사적 교훈

진리의증인 2021. 8. 13. 05:37

이 정만 목사

블로그(네이버:논산동산교회, 다음:논산동산교회)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이사야 60:1-4)

 

서론: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은 메시아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의 영광을 예언하신 말씀이지만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을 소망한 우리 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1910829일 일본의 강압으로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고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전으로 우리나라는 1945815, 36년 만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광복절의 역사적 교훈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우리나라가 앞선 서양문물과 근대화를 거부했기 때문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우리나라가 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36년 동안 식민지지배를 받았느냐? 개국과 근대화를 거부하고 쇄국정책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조선 말기의 우리나라는 왕을 비롯한 모든 위정자들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시대의 흐름을 깨닫지 못하고 멸망해가는 중국만 의지했습니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일본이 우리보다 먼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발전된 구미국가를 모델로 급속히 산업화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었습니다. 메이지 유신이 1853년에서 1877년을 전후해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일본 왕 메이지(明治)가 무사들이 일본을 다스리는 바쿠후체제(幕府體制)를 무너뜨리고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어 일본제국으로 발전했습니다.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일본의 국력이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발전된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뤄 조선을 압도한 것입니다.

18537월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인 M C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1858 미국의 군인) 제독이 개국을 요구하는 미국 대통령의 국서(國書)를 가지고 일본에 와서 개항(開港)을 요구했는데 이 사건이 메이지유신(維新, 폐습을 개혁하여 새롭게 함, 묵은 제도를 새롭게 고침)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미국의 개국요구를 받아들여 1854년 미·일 화친조약을 맺고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地租改正)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 하에 구미 근대국가를 모델로 관주도(官主導)의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력 강화에 노력했습니다. 이 개혁으로 일본은 농업국가에서 근대 산업국가로 변모하는 산업혁명을 이룩하고 일본이 중국을 제치고 아시아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이 개국과 개항을 하고 구미 선진국들의 문물을 받아들여 메이지유신으로 산업화를 이루고 있을 때 우리나라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우리나라는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온 개화사상으로 봉건적 전통사회에서 근대적 시민의식사회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누적된 사회문제가 폭발하여 민란이 자주 일어나고 왕권과 국력이 급속히 약해졌습니다. 1863년에 고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의 26대 왕으로 즉위하지만 왕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섭정(攝政, 임금이 나이가 어리거나 그 밖의 사정으로 임금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림)을 하게 됩니다. 대원군은 섭정 10년 동안 국방을 강화하고 부분적으로 상당한 개혁도 이뤘지만 경복궁의 중수로 국가재정이 바닥나고 과중한 노역으로 민심을 잃어 며느리인 민비에 의해 섭정에서 쫓겨납니다.

대원군이 나라와 민족과 역사 앞에 범한 가장 큰 죄가 무엇이냐? 쇄국정책입니다. 대원군이 근대화에 역행하는 쇄국정책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것입니다. 대원군은 세계정세의 흐름과 제국주의의 탐욕성과 야만성에 너무도 무지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대문만 굳게 걸어 잠그면 나라와 전통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쇄국정책을 취한 것입니다. 대원군은 1866년 정초부터 천주교에 금압령(禁壓令, 억눌러서 못하게 함)을 내려 프랑스신부 9명과 천주교 신도 8000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대원군은 정말 미친놈이지요. 이에 프랑스가 자기 나라 신부를 죽인 데 항의하여 함대를 보내 강화도를 침범했는데 이 사건이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입니다. 우리나라가 프랑스정부로부터 5년마다 임대형식으로 반환받은 외규장각도서도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범한 프랑스함대에 약탈당한 것입니다.

1871년에는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했습니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쳐 평양에 이르러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이 통상을 거부하고 조선군의 포격으로 셔먼호에 타고 있던 토마스 선교사와 승무원 등 23명이 불에 타죽고 익사하게 됩니다. 미국은 사건의 진상규명과 함께 통상조약의 체결을 요구하며 함대를 파견해 강화해협을 통과하자 조선군은 포격전으로 미군함대에 대항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병사가 죽고 여러 지역이 미군에 점령당했는데 미군은 한국에 머물러 싸워봐야 별 이익이 없겠다고 판단하고 40일 만에 철수합니다. 미군이 물러가자 우물 안 개구리인 대원군은 서양과 화친을 거부한다고 척양척화(斥洋斥和)를 외치며 더욱 기고만장했습니다. 신미양요 후 10여 년이 지나 1882년에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는데 일본보다 무려 30년이나 근대화가 늦어졌습니다.

조선이 일찍 문을 열고 선진국의 문물을 받아들였다면 조선의 국력이 일본을 능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같은 선진 국가들과 국교를 맺고 우호관계를 유지했다면 일제의 식민지라는 국가적 굴욕을 피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영국과 아편전쟁에 져서 다 망한 중국(청국)만 믿고 쇄국정책을 펼쳤으니 나라가 어떻게 망하지 않겠습니까? 개인이나 기업이나 국가나 마찬가지입니다. 변화와 흐름을 거부하면 낙오하고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개국과 근대화를 거부하고 쇄국정책을 고집했기 때문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지배를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일본에 대항해 나라 안팎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지만 힘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메이지유신으로 산업화와 부국강병을 이룬 일본은 조선말기의 개화기에 이르러 더욱 한반도에 눈독을 들였는데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이 일본의 한국침략에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운요호사건이 무엇이냐? 조선이 대일 문호개방에 미온적으로 나오자 일본은 1875년 일본군함 운요호를 조선에 침입시켜 조선군의 진지를 유린하며 살인과 방화를 한 후 강제로 강화도조약을 체결했습니다(1876). 이 조약으로 우리나라는 개국이 되지만 동시에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강화도조약(한일수호조약, 병자수호조약)은 일본의 강압으로 맺어진 최초의 불평등조약입니다. 이후 무력을 앞세워 우리나라 내정에 깊숙이 개입한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우리 외교권을 박탈하고 1910년 한일합방(경술국치)으로 우리나라는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됐습니다.

한일합방으로 우리나라를 차지한 일본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우리국민을 착취하고 우리 재물을 찬탈했습니다. 일제는 1910년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해서 개인의 땅으로 신고하지 않은 땅이나, 마을 공동 소유의 땅이나, 국유지를 빼앗아 동양척식회사에 넘겨 일본인에게 헐값으로 팔아넘겼습니다. 일본인에게 거저 나누어주다시피 한 것입니다. 1920년대에는 쌀 증산을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했는데 우리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산업화와 근대화로 일본 농업이 쇠퇴하여 쌀이 부족하자 일본에 쌀을 보내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한반도를 일제의 병참기지로 만들었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우리나라를 무기제조와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일본군의 병참기지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학도병제도와, 지원병제도, 징용, 징병, 위안부 모집으로 조선의 청년을 전쟁터로 몰아넣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날이 갈수록 일제의 강압과 착취가 심해지자 많은 국민이 만주와 연해주, 상해 등지로 떠나 독립운동을 하고 문맹퇴치와 민족계몽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191931일에 일어난 31 독립운동은 우리민족의 저력과 존재감을 세계에 알리는 역사적 계기가 됐지만 조직적이고 통일적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을 위해 우리민족을 이끌어나갈 임시정부가 세워졌습니다. 1919321,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임명하고 노령임시정부가 결성됐고, 1919413일 중국 상해에서는 상해임시정부가 출범했으며, 191941일에는 서울에서 13도 대표가 국민대회 취지서와 선포문을 발표하고 한성임시정부가 세워졌습니다. 임시정부가 세 곳에 세워져 효율적인 통제가 어려워지자 하나로 통합하기로 하고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자는 이승만의 주장을 받아들여 정부의 위치는 임시로 상해에 두고 정부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결정해 상해임시정부가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독립군의 투쟁과 우리임시정부의 힘과 노력으로는 독립운동과 대일항쟁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힘이 없어서 현실적으로 독립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나라 안팎에서 독립운동을 벌였지만 힘이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2차 세계대전에서 미, , 소 중심의 연합국 승리로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았습니다.

1937년 국민당정부의 장개석 군대와 시작된 중일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일본은 영국과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됩니다. 그러자 일본은 19409월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고 프랑스령과 네덜란드령의 인도차이나를 침공했습니다. 이에 중국의 장개석 정권을 지지하고 중국에서 일본의 세력 확대를 경계했던 미국은 미국 내 일본자산을 동결하고 일본에 석유와 철광수출을 제한하여 일본을 고립시켰습니다. 석유와 철광 등 전략물자의 대일본 금수조치는 일본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져왔고 일본군부의 강경파를 자극하여 미국과 전면전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1941128, 일본군은 미국 하와이 주의 진주만을 기습 폭격하여 미국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자신감을 얻은 일본군은 태평양 전선을 확대하여 홍콩, 동부미얀마(버마), 서부 뉴기니섬, 필리핀, 동인도 제도 등 인도양의 대부분과 솔로몬 제도까지 태평양의 거의 모든 섬들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승전은 여기까지입니다. 이후 일본은 지상전과 해전에서 연패하며 전세가 급격히 위축됐습니다.

1942418일 미국의 항공모함 호네트호에서 출격한 16대의 B52 폭격기가 둘리틀(Doolittle raid 1896-) 중령의 지휘 하에 도쿄, 요코하마, 요코스카, 가와사키, 나고야, 고베 등 일본의 주요도시들을 공습했습니다. 이 폭격으로 피해는 크게 입지 않았지만 본토를 공격당한 일본군은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거의 모든 전투에서 패하고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제주도와 일본 열도의 규슈, 오키나와 섬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항전을 계획하지만 미군의 대대적인 일본본토 공습으로 전쟁수행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1945310일에는 도쿄 대공습으로 15만이 넘는 일본인 및 재일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고, 1945623일에는 오키나와가 미군에 함락되고, 194586일에는 히로시마에, 89일에는 나가사키가 원자폭탄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4588일 그동안 중립을 지킨 소련이 만주로 진격하면서 연합군의 일본본토 상륙이 임박하자, 1945815일에 일본이 항복하여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영국과 소련 중심의 연합국의 승리로 해방과 광복을 맞이한 것입니다.

국가의 힘을 국력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도 국가에 힘이 없으면 국가와 민족을 지킬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경제력으로는 세계 10위에 군사력으로는 세계 6위에 올라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세계 어떤 나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강력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국가는 경제와 국방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강대국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와 국방에 기여한 두 나라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나라는 미국이고 우리나라 국방기술에 도움을 준 나라는 러시아입니다. 19909월 우리나라는 소련과 수교를 하면서 소련에 30억 달러의 경협차관을 약속했는데 199112월에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가 소련의 뒤를 잇게 됩니다. 그러다 러시아는 1998년 외환위기를 맞아 대외지불정지를 선언합니다. 이때까지 우리나라가 소련에 제공한 차관은 147천만 달러였는데 이걸 제대로 돌려받기가 어렵게 됐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에 준 차관을 현물로 상환을 받게 되는데 우리가 러시아로부터 받은 현물이 무엇이냐? 세계 최고 수준의 러시아제 무기를 현물로 받았습니다. 자주포, 장갑차, 탱크, 미사일 등등 세계 어떤 나라에도 없는 최첨단 무기를 받은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에게 첨단기술은 안 줍니다. 무기를 비싼 값에 팔아만 먹지 고장이 나면 고쳐주지도 않습니다. 전라남도 고흥의 우주발사기지도 러시아의 도움으로 세웠고 러시아로부터 인공위성과 우주발사체의 기술도 많이 받았습니다.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민족은 36년의 일제침탈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의 국권과 민족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것이 역사의 진실입니다. 일제 식민지시대를 경제분야에 한정해서 일본의 식민지배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발전했다는 주장은 우리 스스로 우리 민족의 자존을 부정하고 독립을 위해 피 흘려 싸운 우국지사들의 희생을 욕되게 하는 친일파와 매국노들의 논리입니다. 연합국의 승전과 독립지사들의 투쟁으로 독립을 얻었지만 우리나라의 독립과 해방을 가져다주신 분은 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에게 해방을 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광복절을 맞이하여 나라의 독립과 국가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시고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 8,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