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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큰 사람

진리의증인 2021. 7. 9. 09:35

이 정만 목사

블로그(네이버:논산동산교회, 다음:논산동산교회)

 

1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 18:1-4)

 

서론: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큰사람입니까?”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리라.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천국에서 큰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세우시고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겸손(謙遜 , 프라우스 πραύς)은 기독교 윤리의 진수이며 기독교 윤리의 최고봉입니다. 기독교는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겸손의 미덕을 역설했습니다. 기독교에서 겸손을 말하기 전에는 겸손에 대한 정의도 없었고 겸손이란 말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철학자의 시조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 그리고 기독교 이전의 모든 학문을 체계화 한 고대 그리스의 최고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나 누구도 겸손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옛날 사람들은 겸손을 약자가 생존을 위해 강자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비굴한 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신은 죽었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미친 소리를 지껄이다 진짜 미쳐서 세상을 떠난 니이체도 기독교의 겸손을 악랄하게 비판했습니다. 19세기 독일의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프레드리히 니이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하나님은 죽었다고 내세를 부인하며 철저하게 이 세상과 세속적인 삶에 집착했습니다. 그러나 니이체는 그토록 집착했던 세속적인 삶으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질병과 고독한 방랑자로 전전하다 미친 광인으로 그의 인생을 마쳤습니다. 니이체는 기독교의 겸손에 대해 바울과 같은 못난 인간들이 일종의 노예근성을 최고의 탁월한 위치에 올려 세움으로 그들의 천박함과 허약성을 변형시키려는 변질된 가치관이라고 혹평했습니다. 겸손이란 노예근성을 가진 비굴하고 못난 인간들이 그들의 천박함과 허약성을 감추고 정당화하기 위한 위장술에 불과하다고 공격한 것입니다. 강자의 힘과 권력이 법과 정의로 통하고 온 세상이 강자의 교만과 압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기독교에 의해 겸손이란 새로운 윤리와 가치관이 세워진 것입니다.

겸손이 무엇이냐? 국어사전에는 겸손에 대해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겸손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겸손은 무엇이냐? 기독교의 겸손은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마땅히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를 말합니다. 기독교의 겸손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고 이웃을 존중하는 기독교 윤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겸손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바로 세워지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 깨닫지 못하면 참된 겸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해야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믿음이 들어가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고 아무리 성경에 대한 지식이 탁월해도 믿음이 없는 사람은 겸손할 수 없습니다. 교만하고 불의한 심령에 믿음이 들어가야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지 깨닫고 겸손한 사람이 되며 성령께서 변화시켜주셔야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용기 있는 사람은 있고 똑똑한 사람은 있어도 겸손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진실한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용기와 영특함은 믿음이 없어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겸손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겸손은 성령의 열매이며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사람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겸손해집니다. 고난과 시련을 통해 교만하고 모나고 그릇된 인간의 성품이 다듬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업에 실패를 해봐야 실패한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고 병으로 자리에 누워봐야 병자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고난과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부인은 재산도 넉넉하고 남편도 가정과 부인밖에 모르는 성실한 사람입니다. 부인은 4남매의 자녀를 두었는데 위로 셋은 서울의 명문대를 나왔습니다. 부인은 고3 자녀를 둔 엄마들이 자녀의 진로 문제로 걱정을 해도 자기와는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나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대학입시에 낙방한 자녀들의 문제로 걱정하면 아이들이 얼마나 공부를 못하면 대학에도 못 들어가느냐고 핀잔을 주고 교만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항상 쾌청한 날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부인의 세 자녀는 서울의 명문대를 나왔지만 막내는 성적이 좋지 않아 수도권에 있는 대학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지방에 있는 대학에 간신히 들어갔습니다. 자기 막내아이가 대학입시에 거듭 실패하고 지방에 있는 대학으로 가게 되자, 부인의 자식자랑과 교만이 꺾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고난과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실패하고 매를 맞고 겸손하게 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실패하고 매 맞기 전에 겸손하게 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천국에서 큰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천국에서 큰 사람은 자기보다 낮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 이스라엘 종교지도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고압적인 자세로 명령하고 지시만 할 뿐 백성들에게 어떤 섬김과 봉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백성들을 호령하고 가르치면서 그들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비판하신 것입니다(마태 23:2-3).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어떤 자세로 섬겨야 할까요? 본문에서 섬기다는 뜻으로 번역된 말은 헬라어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입니다. 디아코노스가 고전적 헬라어에서는 식사 중에 시중을 드는 봉사자를 의미했습니다. 옛날에 하인이나 종은 주인이 식사하는 동안 서서 봉사했습니다. 그래서 하인이나 종처럼 신분이 낮고 천한 일을 하는 사람을 디아코노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디아코노스의 개념이 후대에 와서, 후기 헬라어에서는 유익한 일이나 유익한 일에 봉사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디아코노스는 사역자, 섬기는 자, 사명을 수행하는 자, 복음 전파자, 제자, 종 등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집사나 여집사로 번역된 말도 디아코노스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유익한 일을 하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에서 디아코노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가 하나 더 있는데 후펠레테인(ὑπηρετειν)입니다(4:20, 18:36). 후펠레테인은 갤리(galley)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의미합니다. 갤리선이 무엇이냐? 옛날 헬라나 로마제국의 거대한 전함들은 배에 추진력(엔진)이 없었기 때문에 2층이나 3층 높이의 거대한 배의 밑창에는 노를 젓는 죄수나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이 죄수나 노예들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발에 쇠고랑이 채워진 채 군병의 채찍에 맞으면서 노를 저었습니다. 그러므로 섬기다는 뜻으로 번역된 디아코노스와 후펠레테인의 뜻을 종합하면 첫째, 옛날에 주인이나 높은 고관의 식사에 시중드는 종이나 하인처럼 낮고 겸손한 자세로 섬겨야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명성이 있고 돈이 있다고 호령하고 주장하는 자세로 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디아코노스의 개념이 후대에 와서는 유익한 일이나 유익한 일에 봉사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섬기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봉사를 하고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사람은 중요하고 유익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구제와 봉사와 섬김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셋째, 섬기는 사람은 배의 밑창에서 채찍에 맞으면서 노를 젓는 노예처럼 고난과 어려움 중에도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2:10,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사나 권사나 장로나 직분을 받은 사람은 충성해야 합니다. 천국에서 큰 사람은 대통령이나 돈이 많은 재벌이나 공부를 많이 한 유식한 사람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큰 사람은 자기보다 낮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돌보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죄에서 구원받고 천국에만 들어가도 말할 수 없는 영광인데 천국에서 큰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얼마나 큰 영광이 되겠습니까? 힘들고 어렵더라도 환경 탓하지 마시고 불평하지 마시고 섬기는 일과 맡은 직분에 최선을 다하셔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천국에서 큰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19,에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계명이 무엇이냐? 계명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과 기준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성경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이것은 중요하다 저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성경 말씀을 잘 지키고 행하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성경 말씀이 어렵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성경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오래전에 기록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는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이슈(issue)가 되는 문제를 말씀하셨고 그 당시에는 누구나 아는 문제를 말씀하셨으며 성경을 기록한 사람도 말씀의 의미를 잘 알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성경 말씀이 주어지게 된 역사적 사건과 배경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이 어렵고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되면 진리가 아닙니까? 이해가 되지 않아도 진리는 진리입니다. 성경 말씀은 인간에게 이해가 되느냐, 안 되느냐에 상관없이 만고불변의 진리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지금은 하나님 말씀이 주어진 시대에 비해 세월도 많이 흐르고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성경의 불합리성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도 옳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하나님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성경에 필요 없는 말씀은 한 글자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8). 만고불변의 진리인 성경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잘 지키고 행하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겸손은 기독교 윤리의 금자탑입니다. 어느 날 성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의 제자들이 선생님 기독교 윤리의 첫 번째 덕목이 무엇입니까?” 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겸손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러면 기독교 윤리의 두 번째 덕목은 무엇입니까?” 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것도 겸손이다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그러면 기독교 윤리의 세 번째 덕목은 무엇입니까?” 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윤리의 세 번째 덕목도 겸손이다고 말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왜 그렇게 말했느냐? 예수님께서 겸손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겸손한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 기독교 윤리에서 겸손보다 중요한 덕목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겸손해야 합니다. 천국에서 큰 사람은 첫째 겸손한 사람이며, 둘째 자기보다 낮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이며, 셋째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고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며 겸손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천국에서 큰 사람은 자기보다 낮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갤리(galley)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처럼 섬기는 사람은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도 맡은 직분과 사명에 충성해야 하며 주인의 식탁에서 시중드는 종이나 하인처럼 낮고 겸손한 자세로 섬겨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천국에서 큰 사람은 아무리 작은 계명이라도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고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겸손하게 행하시고 어려운 이웃을 잘 섬기시고 하나님 말씀을 잘 지켜 행하셔서 천국에서 큰 사람으로 인정받으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 7,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