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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편을 선택한 마리아

진리의증인 2021. 3. 19. 05:17

이 정만 목사

블로그(네이버:논산동산교회, 다음:논산동산교회)

 

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1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38-42)

 

서론: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상대로 천국복음을 강론하셨습니다. 언니인 마르다는 예수님의 식사준비로 분주했지만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 예수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식사준비로 바쁜 언니를 도와주지 않는 마리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마리아가 언니를 도와주도록 말씀하여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선택했다고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더 좋은 편을 선택한 마리아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마르다와 마리아는 똑같이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같은 형제지만 성격이 달랐습니다. 마르다가 활동적이라면 마리아는 정적이고 사색적이었으며 마르다가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인 데 비해 마리아는 조용하고 소극적인 성격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집 밖에까지 나가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준비로 매우 분주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음식준비도 돕지 않고 예수님 발아래 앉아서 말씀만 들었습니다. 이처럼 마르다와 마리아는 같은 형제지만 성격도 다르고 예수님을 대접하고 사랑하는 방법도 달랐습니다.

손가락의 지문은 인간을 식별하는 고유 번호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십억 명의 사람이 살고 있지만 같은 지문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의 외모와 성격도 손가락의 지문처럼 사람마다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모나 성격이 비슷한 사람은 있지만 100%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같은 환경에서 자라도 감정이 다르고 지적인 능력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왜 외모와 성격이 다르게 만드시고 인간에게 각각 다른 재능을 주셨느냐? 저는 이것을 조화를 위한 부조화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더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기 위해 다양한 성격의 인간으로 만드셨으며 진보와 발전을 위해 각기 다른 재능과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피아노는 음의 높낮이가 다른 여러 개의 건반들이 움직여서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피아노가 음이나 음만 낸다면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피아노는 음의 높낮이가 다른 여러 개의 건반이 번갈아 소리를 내서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아노나 바이올린 소리보다 아름다운 화음은 모든 악기들이 함께 연주하는 교향악단의 합주곡(合奏曲)입니다. 거기에는 피아노, 바이올린, 클라리넷, 첼로, 풀룻, 색소폰, 드럼 등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들이 다 사용됩니다. 연주를 할 때 피아노나 바이올린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피아노 소리가 필요한 데가 있고 드럼이 필요한 데가 있으며 첼로가 필요한 데가 있습니다. 첼로가 피아노를 대신 할 수 없고 바이올린이 드럼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두 사람 중에 누가 예수님을 더 잘 섬겼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각각 다른 장점을 가지고 예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일을 할 때 마르다와 같이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고 마리아와 같이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일이 있습니다. 효과적인 결과와 능력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그 사람의 성격과 재능에 맞는 일을 맡겨야 합니다. 소극적이고 조용한 성격의 사람을 마르다의 자리에 앉혀 놓고 일을 시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에게 마리아처럼 조용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일을 맡기면 그 사람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는 마르다와 같은 사람도 필요하고 마리아와 같은 사람도 필요합니다. 둘 중에 누가 더 좋은 일군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재능과 은사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둘 다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사랑하고 대접하는 방법이 달랐을 뿐입니다. 교회나 직장이나 사회에서 일을 맡길 때는 그 사람의 성격과 재능에 맞는 일을 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머리로 예수를 믿는 관념적인 신자나 입으로 예수를 믿는 성도는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꼭 필요하고 교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은 앞장서서 행하고 실천하는 마르다 같은 사람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똑같이 주님을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마르다가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랑을 해도 상대의 생각과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한 사랑은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본문 41절에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마르다에 대한 완곡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부드러운 표현으로 마르다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칼빈 선생님은 마르다의 잘못으로 세 가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첫째, 마르다가 너무 낭비적이었다고 말합니다. 본문에는 마르다가 준비하는 일이 많았다......”고 기록돼 있지만 예수님을 위해 낭비에 가까운 준비를 했다는 뜻입니다. 사랑에는 언제나 얼마쯤은 낭비가 있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귀하고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접을 받는 사람이 부담스럽게 여긴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최고의 대접은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마르다의 두 번째 잘못으로 마르다는 불필요한 일에 너무 분주한 나머지 예수님의 방문이 마르다 자신에게 무익하게 행동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약 3키로미터(KM) 거리에 위치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의 집에 들러 쉬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며 그들과 조용히 쉬기를 원하셨는데 마르다가 음식을 준비한다고 소란을 피우며 예수님 앞에 나타나지 않고 예수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는 것보다 훌륭한 대접이 있을까요? 마르다의 이런 태도는 손님을 초대해 놓고 손님을 초대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 경우와 같습니다. 얼마나 큰 결례입니까? 초대를 받고 갔는데 초대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손님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음식을 대접받기 위해 마르다의 집을 찾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통해 은혜를 주고 그들과 은혜로운 시간을 갖기 위해 찾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방문이 마르다에게 무익하게 된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손님이 방문했을 때 방문의 목적에 합당한 대접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르다의 세 번째 잘못으로 마르다는 자신의 부산한 행동을 옳다고 생각하고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를 멸시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주님을 대접하기 위한 마르다의 행위가 옳다면 주님의 뜻을 헤아려 예수님 앞에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행동은 더욱 옳고 합당할 것입니다. 하나님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잘못이 무엇이냐? 자신의 행위와 자신의 방법만 옳다고 생각하는 오만과 독선적인 태도입니다. 자기의 믿음과 행동이 아무리 옳고 정당해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거나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비난하거나 정죄하면 안 됩니다.

마르다의 더 심각한 문제는 마르다의 불만이 마리아만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마르다의 말에는 예수님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서려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왜 마리아에게 언니를 도와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라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절대화하기 시작하면 신앙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 되어 버립니다.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과 예수님이며 신앙의 기준은 성경 말씀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교회는 여러 계층의 사람과 다양한 재능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 일을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헌금도 있고, 전도도 있고, 기도도 있고, 심방도 있고, 봉사도 있고, 가르치는 일도 있습니다. 내가 기도나 전도나 헌금을 많이 한다고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멸시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적게 하더라도 겸손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일을 하는 사람은 소리 없이 해야 하고 남을 멸시하거나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면 안 됩니다. 손님을 대접할 때 손님의 방문 목적과 손님의 뜻에 합당한 대접을 하셔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모든 일에는 먼저 해야 할 일과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문 41-42절에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다마는 한 가지만이라도 좋으니 너도 마리아처럼 더 중요하고 더 가치 있는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란 말씀은 여러 가지 일 중에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일의 우선순위라고 합니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많은 일을 하지만 다른 일보다 중요하고 다른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좋은 음식으로 예수님을 대접하고자 하는 마르다의 마음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마르다와 마리아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도 마리아처럼 예수님 앞에 나와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기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는 하던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경건한 성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쁘고 중요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는 빠지면 안 됩니다. 또한 마르다가 조금 더 사려가 깊었다면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미리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미리 준비를 하고 예수님을 맞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분주하고 허둥댄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고 신앙생활을 잘하시려면 미리미리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주일날 약속은 피해야 하고 만약 상대편에서 일방적으로 주일 날로 약속을 해오면 미리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주일날은 하나님을 위해서 시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를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 선생님께서는 마르다는 중요한 것은 등한히 하고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치우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중요하지도 않는 일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불필요한 일에 얽매이면 진짜 중요한 일은 소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일에 너무 얽매이고 세속적인 일에 너무 분주하면 진짜 중요한 일과 주님께 헌신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이 지엽적인 일에 얽매이면 본말이 전도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이 있고 긴급한 일과 덜 긴급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일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지장이 없도록 일의 우선순위를 분별해서 지혜롭게 행동하셔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마리아는 분명히 마르다보다 더 좋은 편을 선택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하나님 앞에 어떤 일이 더 중요한 일인지 일의 우선순위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께 칭찬받은 것입니다.

반면에 마르다도 마리아 못지않게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마르다는 마리아보다 더 뜨겁고 더 열렬하게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사랑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생각과 자기 방식대로 예수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경솔하게 마르다를 비판하면 안 됩니다. 마르다의 불평처럼 그리스도인이 책임과 봉사와 실천은 외면하고 말씀에만 매달리는 관념적인 신자가 되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행함이 없고 머리와 입술로 믿는 관념적인 신앙은 명백히 잘못된 신앙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믿음은 마리아처럼 말씀도 잘 듣고 마르다처럼 실천하고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교회에는 마리아와 같은 사람도 필요하고 마르다와 같은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마르다의 장점만 합쳐진 믿음, 예를 들면 부지런히 모이고 열심히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지적인 믿음 위에 마르다의 실천하고 행동하는 믿음이 결합되면 이상적인 믿음과 이상적인 성도가 될 것입니다. 마르다의 실천하고 행동하는 믿음에 마리아의 지적인 믿음으로 신앙과 인생에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샬롬--

 

2021, 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