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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진리의증인 2020. 11. 27. 06:00

이 정만 목사

블로그(네이버:논산동산교회, 다음:논산동산교회)

 

1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1-3)

 

서론: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말씀을 산상보훈(山上寶訓), 산상수훈(山上垂訓) 또는 산상설교(山上說敎)라고 합니다. 산상보훈이란 명칭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공생애 초기에 갈릴리 근처에 있는 어떤 산()에 올라가서 말씀을 하신 데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산상보훈이란 산에서 들려주신 보배로운 말씀이란 뜻입니다. 산상보훈에는 기독교 윤리의 심오한 사상이 집약돼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산상보훈을 기독교 윤리의 대헌장이라고 합니다. 산상보훈은 그리스도인의 자아와 그리스도인의 인생관 그리고 기독교가 추구하는 본질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 윤리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산상보훈의 서두에 나오는 여덟 가지 복을 팔복(八福)이라고 하는데 팔복은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할 가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왜 다를까요?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은 가치관이 다르고 인생의 목적이 다르고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팔복은 복이 아니라 상실과 포기와 의무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 시간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물질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심령(心靈)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심령(헬라어 프뉴마(πνεύμα)으로 번역된 말은 영혼, , 마음, 정신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령은 인간의 내면세계와 영적인 영역으로 인격의 바탕과 토대가 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성경 주석가인 벵겔 선생님은 심령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아(自我)라고 정의했습니다. 심령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아이며 인격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가난의 뜻이 무엇이냐? 가난으로 번역된 말은(헬라어 프토코스 πτωχός)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도 사용되고(마태복음 19:21) 거지와 같이 아무것도 없는 자들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누가복음 16:20). 그러나 헬라인들은 이 말을 가장 가난한 상태에 있거나, 물질적으로 전혀 여유가 없는 상태나, 빈털터리 상태의 극빈자에게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이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궁핍과 갈증과 영적 가난과 신령한 가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를 영적인 가난으로 정의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인간의 궁핍과 가난을 예찬하신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은 많이 하셨지만 가난을 예찬하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성경은 물질에 대한 인간의 탐심과 탐욕을 경고하고 있을 뿐 물질 자체를 악하거나 나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질은 인간이 쓰기에 따라 선한 천사의 손길이 될 수도 있고 악마의 유혹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지나친 탐심도 경계해야 하지만 물질을 죄악시하는 태도도 경계해야 합니다. 부자가 재물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고 부자의 재물이 공로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가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하다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는 것도 아니며 가난이나 궁핍이 공로가 될 수도 없습니다. 부자가 재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가난하다는 이유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부자도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고 가난한 사람도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갑니다.

지난 1970-8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우리나라의 민중신학(民衆神學)과 남미의 해방신학(解放神學)은 부자는 악이요 가난은 선이라는 식으로 가난을 미화했습니다. 민중신학자들과 해방신학자들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런 주장을 했다고 할지라도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성경 본래의 뜻을 왜곡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가난은 미덕도 아니고 신앙에 유익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신앙생활에서 가난이 영성(靈性)을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근거 없는 가난의 예찬을 경계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물질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영적으로 가난한 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자신의 믿음에 부족함을 느끼고 자기의 허물과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인가 궁핍과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구하지 않고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가난하고 배가 고픈 사람은 먹어도 배가 고프지만 배가 부른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음식이 나와도 더 이상 먹지 않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진리의 문제도 그와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더 이상 배울 것이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교만을 떨다가 바울 사도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교만한 사람들은 성장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3:17).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하고 우쭐댔지만 예수님께서 보실 때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상태는 가난하고 곤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도 푼수가 있습니다. 영적 자만은 자기 허물과 수치를 모르는 영적푼수의 태도입니다. 자기의 허물과 부족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며 자기의 부족과 허물을 아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부족과 허물을 아는 사람이 겸손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느냐? 마음이 세상의 욕심으로 가득 차 있고 마음으로 무엇인가 믿고 의지하는 데가 있는 사람은 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이 먹을 음식을 찾고 목마른 사람이 마실 물을 찾는 것처럼 영적으로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물질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으로 하나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돈이나 권력이나 세속적인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돈과 재물은 자신감을 주고 경제적 자유를 주지만 헛된 자만심을 갖게 하는 위험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돈과 재물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물질로 헤아리고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성령의 은사를 돈으로 사려고 한 시몬이란 사람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북쪽 이스라엘) 복음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에게 성령을 받게 하려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8:17절 이하).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하자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시몬이 사도들에게 돈을 주며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 것이다고 책망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없는 사람은 신앙 문제까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교만과 무례함이 있습니다. 물질을 믿고 돈을 의지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돈이라는 우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돈이 있어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보다 돈을 의지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돈이나 물질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다음으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권력이나 명예나 세속적인 것을 믿거나 의지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믿는 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권세나 명예나 사회적인 지위를 믿고 의지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도 없고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 정치사에서 권력의 정상에 앉았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권력자들과 그의 측근들의 말로가 어떠했습니까? 하나같이 비참했습니다. 권력을 잘못 사용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고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대사회에서 권력이란 개인의 권력이 아니라 자기가 맡은 직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국가와 국민이 위임한 한정된 재량권입니다. 그러나 많은 위정자들과 공직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은 자신의 직무와 직책에 대한 한정된 재량권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날뛰다가 독재자와 실패자의 길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입니까?

그 외에도 명성이나 외모나 지식이나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믿거나 의지하면 안 됩니다. 예수를 반대하고 교회를 박해했던 사울이 예수를 영접한 다음 그가 예수를 믿기 전에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들이 예수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가 예수를 믿기 전에 자랑스럽게 여겼던 가문과 율법에 대한 지식과 사회적인 지위를 분토와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립보서 3:8).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고 그런 것들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진실할 수 없고 가난한 심령이 될 수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물질이나 권력이나 세속적인 것을 믿거나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반대는 심령이 부요한 사람입니다. 가장 한심하고 불쌍한 신자와 교회에서 말썽부리는 사람은 심령이 부요한 사람입니다. 자기 믿음이 최고라는 자만에 빠져 있는 사람이 심령이 부요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부요한 사람의 대표적인 무리가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진짜로 의롭고 경건해서 심령이 부요한 자들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자기 의에 도취한 자칭 의인들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면 심령이 부요한 자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소망하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돼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돈이나 권력이나 세속적인 것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가 참된 만족을 얻고 참된 행복을 누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고 평탄한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행복과 평탄이라는 인생의 무지개는 호락호락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지개를 잡지만 어떤 사람은 평생 무지개를 쫓아다녀도 잡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도 자신이 꿈꾸는 완전한 무지개는 잡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완전한 무지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지개의 크기를 조금 줄이고 무지개의 모양을 조금 바꿔서 자기의 무지개에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적당한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기 원하고 참된 만족을 원하지만 진정한 복이 무엇이며 참된 만족을 어떻게 얻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진짜 복이 무엇이며 참된 만족을 얻는 방법이 무엇이냐? 진짜 복은 사죄와 구원과 영생이며 참된 만족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도록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 영혼의 만족입니다. 영혼이 만족하지 못하면 절대로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영혼의 만족을 어떻게 얻습니까? 영혼의 만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은혜를 받아야 영혼이 참된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아무리 물질을 하늘높이 쌓아올리고 아무리 명성과 권세를 얻어도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은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과 행복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돈이나 물질을 복이라고 생각하고 병든 사람은 건강을 복이라고 생각하며 정치인은 권력과 명예를 얻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참된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언젠가는 떠나고 잃게 되고 죽음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진짜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자기 허물과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 은혜를 사모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헛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이 깨끗하게 비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욕심과 불의한 생각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가난한 심령이 아니라 부요한 심령이요 불의한 심령입니다. 아무리 큰 그릇도 잡다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으면 그 그릇에는 어떤 것도 더 이상 담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헛된 것들을 버리고 가난한 심령이 돼야 하나님 은혜와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으로 하나님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셔서 신앙과 인생에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0, 1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