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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진리의증인 2020. 4. 3. 07:43

 

이 정만 목사

블로그(네이버:논산동산교회, 다음:논산동산교회)

@메시지55(마태160,설9)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

 

69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태복음 26:69-75)

 

   서론: 봉독한 성경말씀은 두려움과 공포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인지 그리고 성경이 얼마나 정직하게 기록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초대교회를 이끌고 부흥시킨 초대교회의 핵심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베드로를 미화하려고 했다면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의 허물과 수치를 감추고 숨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베드로의 허물과 수치스런 행위까지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베드로는 세 번이나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째 부인을 한 후에 닭이 울자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언하신 예수님 말씀이 생각나서 베드로는 죄책감으로 심히 통곡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도 몇 시간 전까지는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땅이 꺼지도록 장담했습니다(마태 26:31-35, 누가 22:33). 성경에 기록된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와 교훈의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이 실패했으면 나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베드로의 실패의 원인이 무엇이냐?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고 내 믿음은 다른 사람의 믿음과 다르다”는 헛된 자만심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교만하고 자만에 도취한 사람은 실패하지 않을 수 없고 수치를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시간에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지나친 자신감과 헛된 자만심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실패하고 수치를 당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을 과대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신 후에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도망할 것이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마태복음 26:31-35).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구체적인 시간까지 제시하시며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땅이 꺼지도록 장담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3년 반 동안이나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과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자신의 신앙에 자신감과 우월감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장담과 큰 소리는 불과 대여섯 시간도 넘기지 못하고 “나는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는 겁쟁이의 변절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재판 자리에 사도 요한도 함께 있었지만 요한이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말은 성경에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요한복음 18:15 이하). 자고로 옛날부터 큰 소리 치는 사람 치고 말 값하는 사람이 없는 법입니다.

   성도 여러분 중에는 예수님을 위해 순교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보면 순교를 장담한 사람 중에 순교를 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민족의 암흑기인 일제식민지 시대 때 평소에 순교를 강조하던 사람들은 다 신사참배에 앞장선 배신자들이 되었고 6.25 동란 때는 순교를 노래하던 사람들이 공산당의 앞잡이와 공상당의 하수인으로 돌변해서 숨어 있는 그리스도인을 고발하는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순교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에게 순교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가 순교를 할 수 있을지 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순교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교가 왜 어려운지 아십니까? 원수 마귀가 성도를 죽일 때 총이나 칼을 사용해서 짧은 시간에 고통 없이 죽이지를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을 하기 때문에 믿음을 지키고 순교를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 앞에 서게 되면 순교에 대한 생각은 눈 녹듯 사라지고 고문과 죽음의 공포에서 빨리 구원받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순교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순교란 말은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요한계시록 14:13,에서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 잘 믿다가 시험 환난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가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처럼 평안한 환경에서 신앙생활 잘 하다가 시험 환난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가는 사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순교를 신앙의 꽃이라고 하는데 아무나 순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믿음에 겸손해야 합니다. 지나친 자신감과 헛된 자만심은 믿음이 아닙니다. 착각이며 신앙의 거품입니다. 믿음이 진실한 성도와 진짜 순교할 수 있는 사람은 순교를 장담하지 않고 자기 믿음을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나친 자신감과 헛된 자만심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실패하고 수치를 당한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베드로는 지나친 자신감과 헛된 자만심 때문에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하는 수치를 범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믿음에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용기와 믿음을 자랑하면 안 됩니다.

   우리들은 베드로보다 용기가 있을까요? 아니면 베드로만한 용기도 없을까요?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는 위선이나 꾸밈이 없는 정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수제자로 언제나 모든 일에 앞장서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 유일하게 예수님을 따라 바다 위를 걸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병의 귀를 칼로 쳐서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재판 받는 자리에도 다른 제자들은 도망가고 없지만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재판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만 하면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보다 용기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기록된 베드로의 모습은 평소의 정직하고 용기 있는 베드로가 아닙니다.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당신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고 묻자 베드로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여종이란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부름하는 나이 어린 여자아이를 말합니다. 베드로는 창과 칼로 무장한 로마 군인의 심문에 예수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부름하는 어린 여종의 질문에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고 부인이 반복될수록 더욱 강한 어조로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당신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는 첫 번째 질문에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며 간접화법으로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두 번째 여종이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베드로에게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다,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말이 갈릴리 지방의 사투리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에게 “너의 말씨와 억양이 갈릴리 말투인데 왜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부인하느냐?”고 힐난한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모른다. 내가 예수의 제자라면 하나님이 나에게 저주를 내리실 것”이라고 예수를 부인한 것입니다.

   얼마나 가증스럽고 얼마나 구역질나는 인간입니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던 베드로의 장담은 어디로 갔습니까? 환난과 두려움이 없는 환경에서는 누구나 헌금하고 봉사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위협을 느끼지 않았을 때는 정직하고 용감하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위협을 느꼈을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정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 여태껏 정직과 용기의 가면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을 느끼자 정직과 용기의 가면이 벗겨진 것입니다.

   일 년 사계절 내내 잎이 푸른 나무를 상록수라고 하고 가을과 겨울이 되면 잎이 떨어지는 나무를 낙엽수라고 합니다. 여름에는 모든 나무의 잎이 푸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상록수이고 어떤 것이 낙엽수인지 구별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추위가 오고 눈보라가 몰아치면 상록수와 낙엽수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찬바람과 눈보라가 산천을 몰아치면 낙엽수는 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지만 상록수는 차가운 북풍과 눈보라 속에서 더욱 푸르고 청청한 빛을 발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상록수처럼 항상 푸르고 생명력이 넘쳐야 합니다. 평상시 어려움이 없는 환경에서 충성하고 봉사한 것 가지고 자만하면 안 됩니다. 베드로는 우리보다 훨씬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우리보다 훨씬 뜨겁게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세 번이나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느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재판 받는 자리에는 창과 칼로 무장한 로마 군인이 삼엄하게 경비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시인하면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혀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공포와 두려움 앞에서 베드로는 옳고 그름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용기의 한계이며 성도 여러분의 믿음의 실상입니다.

   이 사건이 주는 가장 감동적인 교훈은 예수님은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세 번씩이나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인하시지 않고 용서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福音)이 있습니다. 비겁한 자와 죄인에 대한 용서와 사랑!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진수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49:15,에서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이혼하면서 자식을 버리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혼을 하면서 서로 아이들을 안 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부모는 우리를 버리고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거나 잊지 아니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용기와 믿음 자랑하지 마시고 겸손한 마음과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 믿고 의지하셔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보다 인간이나 세속적인 것을 믿거나 의지하면 안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예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만 세 번이나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배신을 당하는 것은 항상 고통스럽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때는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나는 예수를 모른다.”는 베드로의 부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와 군중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뺨을 맞고, 주먹으로 맞은 것보다 “나는 예수를 모른다.”는 베드로의 부인이 가장 고통스러웠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2:61,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째 부인을 한 후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기 위해 대제사장의 집 뜰에 서 계시던 예수님은 베드로가 세 번이나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의 부인과 배신에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예수님께 베드로의 부인은 가룟 유다의 배신보다 고통과 충격이 더 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가장 신임하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보다 인간이나 세속적인 것을 믿거나 의지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악하고 배은망덕해서가 아니라 연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인간 믿거나 인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진짜 베드로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사람이 베드로입니까?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사람이 베드로입니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한 사람이 베드로입니까? “나는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한 사람이 베드로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은 다 베드로와 같습니다. 변덕스럽고 이기적이고 자랑하고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보다 인간이나 세속적인 것을 믿거나 의지하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첫째, 지나친 자신감과 헛된 자만심을 가진 사람은 실패하고 수치를 당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믿음에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용기와 믿음을 자랑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의 용기란 공포와 두려움 앞에 서면 물거품과 안개처럼 사라지는 허상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보다 인간이나 세속적인 것을 믿거나 의지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했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번 주간은 2020년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0, 4, 5.